뮤지엄한미 삼청본관에서 로저 발렌의 개인전 《Roger Ballen. The Works: Drawing meets Photography》가 열리고 있다. 발렌은 195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활동한다. 미술관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번 전시는 사진과 드로잉, 에칭 등 130여 점으로 60여 년에 걸친 작업을 일곱 부분으로 나눠 보여 준다.
전시 제목부터 드로잉과 사진을 나란히 놓았다. 보도자료에 실린 작가의 말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자기 작업은 "사진인 동시에 드로잉으로 이루어진 무엇"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진 속에 선이 들어오는 방식은 한 가지가 아니다. 렌즈 앞에 그림을 먼저 그려 두고 찍었는지, 그림 자체를 찍었는지, 다 찍은 사진 위에 그림을 그렸는지에 따라 작품의 성격이 달라진다. 이 글은 미술관이 공개한 설명과 이미지를 바탕으로 이 세 가지를 나눠 살펴본다. 편집부는 아직 전시장을 직접 둘러보지 못했다.
렌즈 앞에 먼저 그려 둔 선
〈Roar〉(2002)는 〈Shadow Chamber〉 연작 가운데 한 점이다. 웃통을 벗은 소년이 골판지 상자를 머리 위로 받쳐 든 채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상자 겉면에는 아이가 그린 듯한 얼굴이 빼곡하고, 가운데를 네모나게 뜯어낸 구멍 안에는 공룡 모형이 서 있다. 뒤쪽 벽에도 작은 낙서가 몇 개 보인다.
이 사진에서 그림은 소품 가운데 하나다. 셔터를 누르기 전부터 상자 위에 그려져 있었고, 소년과 공룡 모형과 함께 같은 빛을 받으며 한 장면에 담겼다. 미술관은 2000년 이후 이 연작에서 작가가 장면을 직접 연출하는 비중이 커졌다고 설명한다. 인물과 사물은 물론 배경의 선과 여백까지 작가가 직접 꾸몄다고 한다.
같은 연작의 〈Mimicry〉(2005)에서는 그림과 사람의 몸이 더 가까이 붙어 있다. 벽에 그린 둥근 얼굴 바로 아래로 사람의 두 팔이 엇갈린 채 탁자 위에 놓였다. 얼굴은 벽에 그린 그림이고, 팔은 실제 사람의 팔이다. 사진은 둘을 가리지 않고 한 화면에 담았다.
사진 찍는 사람에게는 익숙한 방식이다. 프레임에 무엇을 넣을지 정하고 셔터를 누른다. 다른 점은 무엇을 넣느냐다. 미술관 설명에 따르면 발렌은 〈Outland〉 연작 무렵부터 현실에서 찾은 선과 형태를 찍다가, 점차 그림과 사물을 직접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런 방식은 새와 쥐가 나오는 연작으로도 이어진다. 미술관은 〈Asylum of the Birds〉와 〈Roger's Rats〉를 한 부분으로 묶고, 이 연작들에서 동물은 소품이 아닌 사람의 동반자로 등장한다고 설명한다. 〈Headless〉(2006)에서는 머리 없는 외투 차림의 인물이 손에 새를 올려놓고 있다. 뒤쪽 벽의 얼굴 그림과 막대 같은 선이 양옆의 앙상한 나뭇가지와 뒤섞여, 어디까지가 그린 선인지 한눈에 구분하기 어렵다.
그림을 찍은 사진
미술관 지하 1층에 걸린 〈Theatre of Apparitions〉 연작은 방식이 다르다. 미술관 설명에 따르면 작가는 어둡게 처리한 유리 표면을 긁거나 지워 선과 형상을 만들고, 그것을 카메라로 찍었다. 긁어낸 자리로는 빛이 통과하고, 나머지는 어둡게 남는다. 보도자료는 이 연작을 '드로잉이 있는 사진'과 구분해 '드로잉을 촬영한 사진'이라고 부른다.
〈Stare〉(2008)도 이 연작에 속한다. 공개된 이미지를 보면 밝은 얼굴처럼 보이는 면 위에 검게 번진 눈 모양이 세 개 있다. 화면 오른쪽은 굵고 검은 띠가 세로로 가르고, 창틀 같은 옅은 선이 가로세로로 지나간다. 공식 캡션에 적힌 재료는 라이트박스 패널(Lightbox panel), 크기는 130×130cm다. 보도자료에는 유리 원판을 함께 전시한다는 내용이 없다. 관람객이 보게 되는 것은 유리 위의 선을 빛으로 옮긴 결과물이다.
〈Thunderous〉(2011)에서는 긁어낸 자국이 더 뚜렷하다. 우산을 치켜든 사람 형상은 몸 안쪽까지 거친 결이 그대로 남아 있고, 위쪽의 흐릿한 얼굴은 초점이 나간 듯 번져 있다. 선명한 선과 뭉개진 형상이 한 화면 안에서 함께 빛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완성한 것은 어느 손일까? 유리를 긁은 손일까, 셔터를 누른 손일까. 〈Stare〉를 폴라로이드 작업과 같은 것으로 보면 이 질문이 흐려진다. 둘 다 사진 위에 그린 선처럼 보이지만, 선이 생긴 바탕도 그은 시점도 다르다.
다 찍은 사진 위에 그린 선
세 번째는 미술관 수장전시실에 따로 마련한 '선을 따라 펼쳐진 발렌의 세계: 폴라로이드 & 에칭'이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곳의 폴라로이드 작품은 사진 표면에 물감으로 선과 색을 직접 더한 것이다. 사진이 먼저 완성되고, 선은 그 위에 나중에 그려진다. 폴라로이드는 보통 찍은 한 장이 곧 원본이라, 그 위에 그은 선도 그 한 장에만 남는다. 다만 전시된 작품이 그런 원본인지는 자료에 나와 있지 않다.
이 방에 걸린 폴라로이드 작품의 제목, 제작 연도, 사용한 물감, 크기는 보도자료에 나오지 않는다. 미술관의 보도용 이미지 목록에도 폴라로이드 도판은 없다. 그래서 이 글에는 폴라로이드 작품 이미지를 싣지 않았다.
색이 들어온 최근 작업
미술관은 〈Spirits and Spaces〉 연작을 중심으로 2020년 이후의 컬러 작업을 소개한다. 보도자료는 최근 작업에서 색이 화면을 이루는 또 하나의 요소가 됐다고 설명한다. 〈Thrown Out〉(2021)에서는 그 색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회색 나무 벽 앞에서 인물이 입은 파란 원피스만 짙게 도드라진다. 가면을 쓴 인물은 빗자루를 쥐고 양동이를 기울이고 있고, 발치에서는 흰 토끼가 뛰어나간다. 오른쪽 벽에는 흰 선으로 그린 얼굴들이 빼곡하다.
〈Omnipresent〉(2022)도 같은 연작이다. 벽 위쪽 두 액자 속 여자 얼굴은 눈 부분에서 하얀 빛이 번져 나온다. 그 아래 어두운 판 일곱 칸에는 분필로 그린 듯한 인물이 하나씩 서 있고, 칸마다 monday부터 sunday까지 요일 이름이 적혀 있다. 바닥에는 낡은 인형들이 철제 의자와 나무 상자 사이에 흩어져 있다. 공개된 이미지 파일은 채도가 낮아 거의 흑백처럼 보인다.
두 작품 모두 기본 구성은 〈Roar〉와 닮았다. 그림이 렌즈 앞에 먼저 놓이고, 사물과 함께 한 장면에 담긴다. 스무 해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볼 때 더 분명해질 것이다.
작품 캡션부터 읽어 보자
필름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이 전시는 단순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 사진은 어디까지가 사진일까? 렌즈 앞에 그림을 세우는 일, 그림 자체를 찍는 일, 다 찍은 사진에 손을 대는 일은 모두 사진과 드로잉을 섞는다. 다만 셔터를 누르는 때와 선을 긋는 때의 순서가 매번 다르다.
전시장에서는 작품 옆 캡션의 재료 표기부터 읽어 보기를 권한다. Inkjet print, Lightbox panel, 그리고 폴라로이드 위의 물감. 비슷해 보이는 작품이라도 그 한 줄을 보면 선이 어디에 그어졌는지 알 수 있다. 덧붙이자면 Inkjet print는 전시를 위해 출력한 방식을 가리킨다. 발렌이 어떤 카메라와 필름으로 찍었는지는 이번 전시 자료에 나오지 않는다.
관람 정보
아래 내용은 미술관 보도자료를 기준으로 했다. 미술관 누리집에서는 다시 확인하지 못했으니, 가기 전에 공식 안내를 한 번 더 확인하길 권한다.
- 기간 2026년 10월 16일(금) ~ 2027년 2월 21일(일)
- 장소 뮤지엄한미 삼청본관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9길 45)
- 관람 시간 화~일 10:00~18:00, 월요일 휴관
- 관람료 성인 15,000원 (본관·별관 통합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