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필름카메라 중고거래를 하면서 한두 번쯤은 재미있는 경험을 해보셨을 것 같아요. 저 역시 기억에 남는 거래가 몇 번 있었는데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조금 풀어보려고 합니다.

아! 첫 번째 글 재미있다고 말씀해 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싸이월드 일기장 이후로 이런 글 써보는 게 정말 오랜만인데, 덕분에 용기를 얻어서 두 번째 글도 이어가게 됐어요.

시골 마을의 할아버지, 그리고 슬라이드 한 장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필름 스캐너 사러 갔던 날입니다. 차를 한 시간 반 정도 몰고 호주의 한 작은 시골 마을까지 갔는데, 거기서 만난 할아버지와의 거래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중고거래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수다를 떨게 되는데, 특히 호주에서 연세 있으신 분들을 만나면 마치 짧게 과거로 여행 다녀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사진을 찍어 오신 분이었어요. 아카이빙도 굉장히 체계적이었고, 새와 꽃 촬영을 특히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할머니와 함께 오래 사진 생활을 해 오셨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어요.

덕분에 멋진 사진들을 잔뜩 구경할 수 있었고, 거래가 끝나고 나니까 "이제 안 쓰니까 가져가" 하면서 코닥 슬라이드 환등기 까지 무료로 주셨습니다.

슬라이드 한 장을 루페로 들여다본 모습.
루페로 처음 들여다본 그 한 장.
할아버지가 보여주신 옛 슬라이드 — 흰 개와 함께.
문 앞에 선 두 사람이 담긴 옛 슬라이드.
할아버지의 마당이 담긴 옛 슬라이드.

그날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할아버지가 보물처럼 꺼내 보여주신 한 장의 슬라이드였어요.

사진 속에는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백인 소녀가 있었는데, 컬러 사진이라 저는 당연히 손녀 사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진은 할머니의 어린 시절 모습이었어요.

특히 한국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의 컬러 사진을 거의 볼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할머니의 고등학생 시절이 담긴 슬라이드 한 장은 정말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카메라 컬렉터와 70년 전의 필름 한 롤

두 번째는 카메라 컬렉터 아저씨와의 잊지 못할 기억입니다.

그분은 정말 필름카메라 마니아 중에서도 마니아였어요. 필름카메라 세계도 파고들면 끝이 없는데, 그중에서도 아주 깊은 영역에 계셨던 분이죠. 호주에서는 구매자를 찾기 어려운 희귀 카메라들을 수집하고 계셨고, 매년 독일까지 가서 경매에 직접 출품한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멋진 카메라들을 잔뜩 구경했지만, 솔직히 저는 그 가치를 다 알지 못해서 전부 비슷한 필름카메라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ㅋㅋ

Kodak Brownie Flash II 마켓플레이스 리스팅 스크린샷.
거래의 시작은 한 통의 메시지였습니다. "STILL HAS EXPOSED FILM INSIDE, BUT NOT SURE OF ITS CONDITION."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아저씨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가끔 카메라를 사면 판매자가 가치 있는 카메라랑 가치 없는 잡카메라를 한 박스 가득 같이 보내주는 경우가 있다고요.

사실 제가 그분을 찾아간 이유도 그런 카메라 중 하나였던 코닥 브라우니 박스카메라 를 구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책장 위에 나란히 놓인 Kodak Brownie Flash II 두 대.
Kodak Brownie Flash II. 가치 있는 카메라 한 대를 사면, 가끔은 잡카메라가 한 박스째 따라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지금 생각해도 소름 돋는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카메라 안에 필름이 한 롤 들어 있었어요.

카메라 안에서 발견된 오래된 Kodacolor II 필름 한 통.
카메라 안에서 나온 Kodacolor II 한 통. 언제 적인지 가늠도 안 됩니다.

너무 오래된 카메라라 필름이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현상이 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직접 현상해 보기로 했어요.

오랫동안 카메라 안에 감겨 있던 필름이라 현상 릴에 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더라고요.

현상을 마치고 매달아 둔 오래된 필름 한 조각.
현상을 마치고 처음 들어 올려본 한 조각.

그렇게 어렵게 현상을 마쳤는데…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사진이 나온 거예요.

필름에서 나온 빈티지 벤틀리 사진 1.
카포트 옆에 선 여인과 벤틀리.
영국풍 코티지 앞에 선 빈티지 벤틀리.
빈티지 벤틀리들과 모여 있는 사람들.
필름엔 1940~50년대쯤으로 추정되는 호주의 벤틀리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정말 짜릿했어요.

예전에 이 이야기를 짧은 쇼츠 영상으로 올렸는데 조회수도 꽤 잘 나왔던 기억이 있고, 많은 분들이 주인을 찾아주는 콘텐츠를 해보라고 하셔서 여기저기 수소문도 해봤습니다. 심지어 호주 벤틀리에도 이메일을 보내봤지만 결국 답장은 못 받았어요.

결국 그 필름은 아직도 저만의 신기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게라지 세일에서 만난 한 뭉치의 필름

게라지 세일에서 건진 오래된 Agfa Isopan ISS 필름 한 통.
한 뭉치 중 한 통. 라벨엔 독일어로 EXPONIERT — 이미 노출됐다는 표시.

마지막은 게라지 세일에서 산 필름 뭉치 이야기예요.

외국에는 게라지 세일 이라는 문화가 있는데, 집 정리를 하면서 필요 없는 물건이나 부모님의 유품을 마당에서 작게 파는, 바자회 같은 느낌입니다. 제가 한창 이베이랑 호주 당근에 푹 빠져 있던 3~4년 전쯤에 산 물건이었어요.

필름들은 대략 40~50년 정도 됐고,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된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모자를 쓴 세 사람이 벤치에 앉아 있는 옛 흑백 사진.

스캔을 한 뒤에 판매자에게 사진을 보내며 혹시 누군지 아느냐고 물어봤지만, 판매자도 증조할아버지 유품인 것 같다고만 하시고 본인도 잘 모르는 가족이라고 답했어요.

배 갑판 위에서 의자에 앉은 남자와 사다리에 매달린 아이.
호주로 향하던 배 위의 한 컷.
시골 교회 앞에 모인 아이들의 흑백 사진.
해변 파빌리온 앞에 둘러앉은 가족 사진.
모래 언덕 옆에 유모차를 끌고 선 여인의 흑백 사진.
들판에서 컵을 들고 선 네 남자의 흑백 사진.
집 앞에 선 여인들과 아이들의 흑백 가족 사진.
사진들 속에는 호주로 이주하기 전의 모습부터, 정착한 뒤의 일상까지 두루 담겨 있었습니다.

사진들 속에는 호주로 이주하기 전의 모습도 있었고, 정착한 뒤 여행을 다니는 모습, 집에서의 일상, 교회 행사 같은 다양한 장면들이 담겨 있었어요.

흥미로워서 호주의 한 페이스북 그룹에도 사진을 올려봤는데, 역시 덕중의 덕은 양덕 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페이스북 그룹에 달린 댓글 — 옛 사진과 현재 위치를 비교해 알려준 화면.
옛 사진 속 장소를 하나하나 찾아주기 시작한 페이스북 그룹.

몇몇 분들이 사진 속 장소를 분석해 현재 위치까지 알려주셨고, 저는 실제로 그 장소들을 찾아가 보기도 했습니다. 남호주의 한 와이너리, 오래된 교회, 그리고 바닷가.

흑백사진 속 사람들이 서 있던 자리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을 직접 보니 정말 신기했어요. 마치 역사의 작은 조각을 손에 쥐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자료들을 잘 보관해 두었다가 박물관 같은 곳에 기증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결국 사람과 사진 이야기

여러분도 필름카메라 중고거래를 하면서 재미있는 경험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저는 원래 극 I 라 사람 만나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이상하게 필름카메라와 얽힌 만남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필름 이야기, 사진 이야기, 그리고 오래된 물건에 담긴 추억들을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럼 다음 편에서도 더 재미있는 필름 헛소리로 찾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