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는다는 건 붙잡는 일이 아니라, 사라지기 전에 오래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떤 사진가는 셔터를 빨리 누른다. 구본창은 오래 바라보는 쪽이다.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현대사진이 예술로 대접받기 전부터 카메라를 들었고, 40년 넘게 같은 질문을 붙들어 왔다. 사라지는 것들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 지금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는 그가 기획한 사진전 《진동하는 사물들》이 열리고 있다. 이 글은 그 전시로 향하는 짧은 안내이자, 한 사진가의 오랜 항해에 대한 기록이다.

회사원에서 사진가로

그의 출발은 사진이 아니었다. 연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회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오래 머물지 못했다. 1980년 독일 함부르크로 건너가 사진을 처음부터 다시 배웠고, 국립조형예술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1985년에 돌아왔다. 남들이 자리를 잡는 나이에 방향을 튼 것이다. 이 늦은 출발은 그의 사진 전체에 배어 있다. 서두르지 않고, 한 주제를 몇 해씩 붙들고 늘어지는 태도.

사진을 물건으로 만들다

구본창 〈In the Beginning〉 연작. 흑백 인화지를 여러 장 잇고 실로 꿰매 만든 몸의 이미지.
〈In the Beginning〉(1991). 여러 장의 인화지를 잇고 실로 꿰매어 하나의 몸을 만들었다. 사진이 곧 만질 수 있는 물건이 된다. 이미지 ⓒ 구본창 bckoo.com

귀국 직후의 작업은 낯설었다. 〈In the Beginning〉(1991) 연작에서 그는 몸을 붕대로 감고, 인화한 사진을 실로 꿰매고 겹쳤다. 사진을 벽에 거는 매끈한 이미지가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건으로 다룬 것이다. 필름과 인화지, 암실의 시간을 거친 결과물을 다시 바느질로 마감하는 이 방식은, 사진이 곧 물성이라는 그의 생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화면 뒤에 실제 재료와 노동이 있다는 감각. 디지털이 모든 걸 매끈하게 만드는 지금 다시 봐도 묵직하다.

숨, 그리고 사라지는 것들

〈굿바이 파라다이스〉(1993), 〈숨〉(1995)으로 이어지며 그의 주제는 분명해졌다. 소멸과 기억이다. 사라지기 직전의 것, 이미 낡아버린 것, 곧 잊힐 것들을 그는 조용히 화면 안에 들인다. 극적인 사건은 없다. 대신 오래 들여다봐야 보이는 결이 있다.

백자, 흩어진 것을 불러 모으다

구본창의 백자 연작. 담담한 여백 위에 놓인 조선 달항아리.
〈Vessel / 백자〉(2004~06). 세계 곳곳에 흩어진 조선백자를, 과장 없는 여백 위에 다시 세워두었다. 이미지 ⓒ 구본창 bckoo.com

그의 이름을 세계에 각인시킨 건 백자였다. 〈Vessel〉(2004~06) 연작에서 그는 세계 곳곳의 미술관에 흩어져 있는 조선백자를 찾아다니며 찍었다. 화려한 배경도, 과장된 조명도 없이, 달항아리 하나를 담담한 여백 위에 세워둔다. 흩어져 있던 그릇들이 사진 안에서 비로소 한자리에 모인다. 관광엽서 속 청자의 화려함에 눌려 있던 백자의 아름다움이, 그의 사진을 통해 다시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낡은 것들의 표정

구본창 〈Soap〉 연작 - 오래 써서 닳고 색이 바랜 비누 구본창 〈Soap〉 연작 - 오래 써서 닳고 색이 바랜 비누 구본창 〈Soap〉 연작 - 오래 써서 닳고 색이 바랜 비누 구본창 〈Soap〉 연작 - 오래 써서 닳고 색이 바랜 비누 구본창 〈Soap〉 연작 - 오래 써서 닳고 색이 바랜 비누 구본창 〈Soap〉 연작 - 오래 써서 닳고 색이 바랜 비누 구본창 〈Soap〉 연작 - 오래 써서 닳고 색이 바랜 비누 구본창 〈Soap〉 연작 - 오래 써서 닳고 색이 바랜 비누 구본창 〈Soap〉 연작 - 오래 써서 닳고 색이 바랜 비누 구본창 〈Soap〉 연작 - 오래 써서 닳고 색이 바랜 비누 구본창 〈Soap〉 연작 - 오래 써서 닳고 색이 바랜 비누 구본창 〈Soap〉 연작 - 오래 써서 닳고 색이 바랜 비누
〈Soap / 비누〉(2004~07). 닳고 바랜 비누 하나하나를 표본처럼 늘어놓았다. 새것의 반짝임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간 자리다. 이미지 ⓒ 구본창 bckoo.com

〈Soap〉(2004~07)에서는 오래 써서 닳은 비누를, 〈탈〉에서는 나무의 얼굴들을 들여다봤다. 새것의 반짝임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간 자리를 그는 계속 찍는다. 닳고 갈라지고 색이 바랜 것들. 버려지기 직전의 사물에서 그는 표정을 읽어낸다.

세계로 나아간 사진

한국 사진가의 작품이 해외 유수의 미술관에 걸리는 일이 드물던 시절, 그의 사진은 게티미술관, 보스턴미술관, 대영박물관, V&A로 들어갔다. 한국 현대사진의 위상을 국제 무대로 끌어올린 자리에 그가 있었다. 2023년 겨울, 서울시립미술관은 그의 반세기를 《구본창의 항해》라는 이름으로 펼쳤다. 열여섯 살에 찍은 첫 자화상부터 최근작까지 500여 점. 한 사람이 얼마나 오래, 얼마나 성실하게 한 길을 걸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규모였다.

다시, 진동하는 사물들

국제갤러리 전시 《진동하는 사물들 Objects in Oscillation》 포스터. 9인 작가의 정물 사진이 격자로 배열되어 있다.
《진동하는 사물들 (Objects in Oscillation)》. 구본창이 기획한 국제갤러리 사진전, 9인의 정물 사진. 포스터 ⓒ 국제갤러리

그리고 지금, 그는 후배 사진가들과 다시 한자리에 섰다.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진동하는 사물들》은 구본창이 직접 기획한 전시로, 아홉 명의 사진가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AI가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후보정이 모든 걸 매끈하게 다듬는 시대에, 이들은 과한 손질 없이 눈과 감각, 그리고 카메라의 광학만으로 정물을 담는다. 멈춘 듯 보이는 사물이 실은 조용히 진동하고 있다는 것. 전시 제목이 그대로 그 태도를 말한다.

빠르게 찍고 빠르게 넘기는 시대다. 그러나 그의 사진은 정반대를 말한다. 오래 바라보는 일, 손으로 매만지는 일, 사라지는 것 앞에서 서두르지 않는 일. 필름 한 통을 아껴 감듯이, 그는 한 장면을 오래 품는다. 우리가 그의 사진을 다시 꺼내 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전시진동하는 사물들 (Objects in Oscillation)
장소국제갤러리 K1·K2 (서울 종로구 삼청로)
기간2026. 6. 9 ~ 7. 19
기획구본창 (국제갤러리 첫 사진 기획전)
참여구본창, 김수강, 김경태, 구성연, 박찬우, 조선희, 정정호, 정희승, 조성연
Exhibition

국제갤러리에서 《진동하는 사물들》

구본창이 기획한 9인의 정물 사진전. 7월 19일까지,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직접 만나보세요.